글 : 유승주
‘치 익’
버스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자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한다. 마지막 사람이 내리면 그제야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린다.
‘치 익’
다시 문이 요란스럽게 닫힌다. 오늘이 혼자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온 지 다섯 번째 날이다. 조금은 익숙해진 터미널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간다. 늘 그렇듯 터미널 안의 사람들은 모두 바빠 보인다. 다들 뭐가 이리 바쁜 걸까? 잠시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한 여자의 진한 노란색 카디건이 눈에 꽂힌다.
저런 노란 옷은 또 처음 본다. 근데 저 노란색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나지 않는다. 아. 궁금해 미치겠다. 기억해내려 고개를 까닥이며 눈을 꼭 감고 얼굴을 잔뜩 찡그려 기억을 쥐어 짜내본다. 아. 맞다! 엄마가 끓여주신 단호박죽! 그걸 기억해 내다니. 갑자기 너무 기분이 좋아 하~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 참, 이러면 안 되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너무 한 곳을 오래 보면 안 된다. 특히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 그리고 여자는 더더욱 쳐다보면 안 된다. 엄마가 늘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한 곳에 너무 오래 서 있어도 안 된다. 멍하지 서 있지 말라고 엄마가 늘 말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 단호박죽 색의 옷을 보고 싶다. 단호박죽 먹고 싶게 저 여자는 왜 저런 옷을 입어서는…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하는 내 눈알을 억지로 바닥을 보게 눈에 힘을 주었다. 겨우 참아내고 바닥을 보며 터미널을 빠져나온다.
‘띠리리리링’
“아,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주머니 속 내 핸드폰 벨 소리다.
“여보세요.”
‘잘 도착했지?’
“네.”
‘그래, 상태도 이제 많이 가봤으니깐 잘 할 수 있겠지? 길 건너서 버스 타는 거 알지? 잠들지 말고 방송 잘 듣다가 잘 내려야 해. 알았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네.”
엄마는 제발 한가지씩만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선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 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을 따라 나도 길을 건넌다. 정류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버스가 오길 기다린다. 여기저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자꾸 시선이 간다. 지난번에도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버스를 놓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버스가 오는지 쳐다보고 있는데 내 앞으로 한 아저씨가 멈춰 섰다. 아저씨 때문에 버스가 오는 게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아저씨한테 비켜달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버스가 보이게 일어나야 하는 걸까? 아저씨의 왼쪽 오른쪽 뒤를 보려고 앉은 채로 몸을 왼쪽으로 꺾었다가 오른쪽으로 꺾었다 하며 왔다 갔다 했다. 이런, 너무 흔들었나?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아, 누가 날 쳐다보면 안 되는데.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서자마자 저 멀리 버스가 오는 게 보인다. 휴, 다행이다.
‘치 익’
늘 그렇듯이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요금을 낸다.
‘철컥철컥’
기사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내어 주신다. 동전을 주머니에 챙기고는 비어있는 운전기사 아저씨 바로 뒷자리에 앉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많은 차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 요즘 새로 나온 차 중에 아주 멋진 자동차를 본 적이 있다. 경주용 차처럼 생겼는데 이름이 투스카니라고 했다. 투스카니라는 차를 타보고 싶다. 엄마 말로는 그러려면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고 했다. 내가 운전면허를 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오늘은 투스카니를 보지 못했다. 이따 가는 길에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 역은 을지로 6가, 을지로 6가입니다.’
이번에 내려야 한다.
‘삑’
뒷문으로 가서 벨을 누른다.
‘치 익’
버스에서 내려 익숙하게 병원 쪽으로 걸어간다. 두 달에 한 번씩 약을 받으러 병원으로 온다. 10년 전 연탄가스를 마시고는 뇌에 문제가 생겨 여러 가지 능력이 부족해졌다고 엄마가 말해줬다. 그래서 원래는 서울에 살았는데 나 때문에 시골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고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냥 매일 그런 하루하루였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학교에 다녔고 아빠가 시키는 일을 했고 매일 약을 먹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낮에도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고 가끔 엄마와 서울에 약을 타러 왔다. 엄마와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이 참 신기하고 좋았다. 그래서 올 때마다 엄마에게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서울에 오면 병원에 가는 길을 나에게 열심히 설명해주셨고 작년부터는 혼자 병원에 오기 시작했다. 내가 병원을 혼자 다닐 수 있게 되면 서울에서 살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서울에 올 때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나에게는 아주 큰 즐거움이다. 선생님은 늘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항상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빨리 서울에 살았으면 좋겠다.
병원에 도착해서 시계를 봤다. 2:30분이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이상태 환자분“
“네.”
“들어가세요.”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신다.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앉아요.”
“네.”
조심스럽게 선생님 앞에 앉는다.
“오늘 오는 길을 어땠어요?”
“좋았어요, 투스카니를 못 봐서 아쉬웠지만.”
“하하. 그랬군요. 어서 면허도 따고 여자 친구도 만들어서 투스카니타고 드라이브해야겠네.”
“네? 여자 친구요?”
“하하. 벌써 여자 친구가 생긴 거예요?”
“아니요!”
“병원도 이렇게 혼자 올 수 있으니 일자리도 알아보고 여자 친구도 만들고 해야지요.”
“제가 어떻게요.”
“무슨 소리예요? 얼마든지 가능해요.”
“…”
“두 달 동안 특별히 불편하거나 평소와 달랐거나 하는 점은 없었나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럼 다음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네? 아, 네.”
“그럼 두 달 후에 봅시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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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